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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_작가노트

 

붓을 잡는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다 어느 순간, 작업이 가야할 방향이 보인다. 

그때 다시 작업이 시작된다. 

그러다 우연을 만나고, 또 다른 우연을 만나며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우연들을 받아들이고 통제하며, 마음과 손이 만나길 기다린다. 

그 긴장감이 좋다. 

 

예전 작업들이 ‘천 번의 숨’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요즘은 ‘숨 한 모금’에 대해 생각한다. 

존재가 있음을 보여주는, 하지만 충분히 말해주기에는 부족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 어디 즈음, 숨 한 모금 있을 것 같다.

스치는 듯한 모습으로.

 

요즘엔 작업을 계속 이어간다는게

내가 달라지고 있다는걸 인정한다는 말과 같이 느껴진다. 

순간순간 변해가는 나의 상태에 집중하기를 원한다. 

그게 가장 나답게 작업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어쩌면 작업은 끊임없이 바뀌어가는 나를 남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2023.08_작가노트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한없는 자유와 한없이 정적인 것이 공존하며 고요와 침묵 끝 명상에 이른다. 

마치 프리다이빙처럼.

 

숨을 차분히 가다듬는다. 

확신과 불신이 교차하며 우연을 받아들이고 통제한다.

단순함과 고요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수많은 붓질이 사라지고 큰 숨 하나 덩그라니 남으면 좋겠다.

고요하지만 연약하지 않은 모습으로.

마띠에르 없는 물감 몇 그램의 흔적만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싶다. 

얕은 숨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이 있음을 느낄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작업이 좀 더 쉬워질 줄 알았지만 작업은 여전히 어렵다.

작업이 쌓이면 말하고 싶은 것이 좀 더 명확해질 줄 알았으나 여전히 찾는 중이다.

 

 

2023.03_작가노트 

온전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들에 마음이 끌린다.

 

폭발하는 듯한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하고 타고 남은 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제되고 신성해 보이다가도 원시벽화 같이 거칠고 장엄하다.

엄청난 힘을 품은 듯 하다가 바람이 불면 훅 날아가버릴 것도 같다. 

모든 것 같기도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단순함과 고요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더 알고싶은 마음에 작업을 시작한다.

마음과 손이 만나길 기다리고, 

의지와 의지를 벗어난 것들 사이로, 나에 대한 확신과 불신이 교차하며 작업이 진행된다. 

 

있음을 애써 증명하는 것이 아닌, 

물감 몇 그램의 흔적으로 그 존재를 자연스레 드러내고 싶다. 

마치 얕은 숨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의 존재를 느낄 수 있듯이,

고요하지만 연약하지 않게 드러내고자 한다. 

2022_작가노트 

 바닷가 한편에 자리를 잡고 스케치북을 꺼냈다. 파도 한 조각 한 조각을 옮기고 싶었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파도는 붓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모양을 바꾼다. 파도가 가득한 드로잉으로 스케치북을 채우고자 했지만, 정작 아무 것도 그리지 못했다. 파도를 그리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한 채 종이 위, 무작정 검은 선을 긋기 시작했다. 거친 선들이 서로 부딪히고, 물감을 튀기며 오히려 파도보다 더 파도같다. 그리는걸 포기하자 파도가 그려졌다. 

 

 파도의 시작과 끝을 정하는게 무의미하고, 인간의 삶과 죽음을 구분짓는 것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내가 작업으로 담고자 하는건 변화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모든 것 사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 어디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작업을 하는게 아닌가 싶다. 

 

파도가 바위를 치고 부스러진다. 

파도가 바위를 치고 부스러진다. 

파도가 바위를 치고 부스러진다. 

거기에서 힘, 부드러움, 나약함, 위로, 휩쓸림, 의지, 안착, 안도, 그리고 그 안의 중심을 본다.

그것이 세상을, 혹은 작품을 대하는 내 태도인 듯 하다. 

 

2021_작가노트

 어릴 적,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말을 수시로 하고 다녔다. 그것이 죽음의 공포에 대한 자기방어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어릴 적 트라우마에 대해 묻지만 그것과는 무관한 듯 하다. 죽음이 고통스러운 삶의 탈출구일지 모른다는 생각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철망 사이로 바닷물이 이리저리 오가는 것처럼, 경계가 없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이라 부르는 순간, 그 실재는 없어지고 서로 이어져 있던 끈도 사라지는 것 같다.

 

 캔버스 위, 내 의지와 의지를 벗어난 것들 사이로 그것을 담고자 한다. 또한 있음을 애써 증명하는 것이 아닌, 단지 물감 몇 그램의 흔적으로 그 존재를 자연스레 드러내고 싶다. 내 의지와 인식을 벗어난 것처럼, 마치 얕은 숨만으로도 사람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죽음과 삶의 경계가 그러한 것이길 바란다. 

 이십 대 즈음, Mark Rothko 작품 앞에서 숨이 멎을 듯 했다. 당시에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삼십 대가 끝나갈 무렵, 윤형근 작가의 작품 앞에서 다시금 그때의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 삶을 초월해 죽음을 품으려 한 작가의 모습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작품을 통해 죽음의 무게를 평온히 안고 싶다. 작품 속 나에게 맞는 움직임과 호흡들이 모여 단순하고 더 단순한 모습으로.

2020_작가노트

 어느 가을밤, 산 한가운데 위치한 숙소를 잡았다. 바뀐 잠자리에 몸을 뒤척이다 밖을 나오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 속, 요란한 물소리가 사방을 휘감는다. 어둠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커다란 물줄기가 나무 기둥들을 이리저리 타고 올라가 떨어지는 상상을 하며 금방이라도 내 옷이 젖을 듯한 착각에 빠진다. 다음 날, 잠에서 깨 밖을 나오니 숙소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작은 개울 하나가 있다. 어젯밤 들렸던 요란한 물소리 대신 거의 들리지도 않은 소리를 내며. 

 

내가 서있던 그곳은 어디였을까. 

 

 작품 안, 내가 옮기고자 하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그날 밤, 그 숲과 닮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삶과 죽음 사이 어디 즈음, 희미한 경계로 내게 다가온다. 있음을 넘어선 어떤 것, 무슨 말로도 채워지기 힘든, 작품 앞에 섰을 때 비로서 그 존재가 보이기를 바라며. 그것이 코끝을 오가는 들숨과 날숨의 형태로, 혹은 성글어진 씨실과 날실 사이 이리저리 통과하는 공기 몇 그램의 무게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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