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 by Hyunhee Im

< 작가노트_2019>

 

 어느 가을, 산 한가운데 위치한 숙소를 잡았다. 바뀐 잠자리에 몸을 뒤척이다 밖을 나오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 속, 요란한 물소리가 사방을 휘감고 있다. 어둠으로 둘러 쌓인 그곳에서 커다란 물줄기가 이리저리 나무 기둥들을 타고 올라가 떨어지는 상상을 하며, 금방이라도 내 옷이 젖을 듯한 착각에 빠진다. 다음 날, 잠에서 깨 밖을 나오니, 숙소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작은 개울 하나가 있다. 어젯밤 들렸던 요란한 물소리 대신, 거의 들리지도 않은 소리를 내며 작은 물줄기 하나가 흐르고 있었다. 어제, 내가 서있던 그곳은 어디였을까. 

 내가 작품으로 옮기고자 하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그날의 장소와 닮아있다.

 화면 위, 그날 밤의 물소리를 옮겨본다. 흰 물자국이 이리저리 흩뿌려지며 종이를 채운다. 언뜻 보기에 모노톤의 물감들이 흩뿌려진 듯 보이지만, 손으로 가만히 종이를 쓸어보면 물감의 흔적이 만져지지 않는다. 물감을 얹어 채우는 대신, 흰 여백을 마스킹으로 가리고 먹물을 여러차례 얹어 마지막에 덮였던 마스킹을 뜯어내고 흰 여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였다. 만약 물감을 흩뿌려 작업했다면 손으로 종이를 쓸었을 때 물감의 흔적이 만져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였기 때문에, 화면에 가득 찬 이미지와 달리 손으로 종이를 쓸어내면 아무 흔적도 만져지지 않는다. 다음 날 사라져버린 그날 밤 그 공간과 같이, 이미지는 존재하나 허공만이 남겨진 화면을 만들고자 하였다. 

 혹은 화면 위 검은 선을 반복적으로 그으며 작업을 진행한다. 흐르는 물감은 먹이 종이에 스미듯 캔버스에 자취를 남기고, 앞선 선들이 덮여가며 화면 위, 검은 선과 하얀 여백이 남는다. 무의식적으로 그은 선이 만들어 낸 우연한 자취 속에서, 눈을 깜박이는 순간 지나치는 섬광의 이미지를 보며, 혹은 목까지 차오른 물위로 간신히 숨을 쉬게 하는 죽음과 삶을 가르는 경계의 이미지를 상상한다. 

 천 개의 물소리 작업을 하며 문득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언가 가득 차 있으리라 생각되는 삶이란 공간이, 이미지는 가득 차 있으나 비어있는 저 종이처럼 오히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또, 비어있는 공간이라 생각되는 죽음이라는 곳이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허공에 이미지가 가득 찬 저 작품처럼, 무언가가 빼곡히 들어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는 씨실과 날실을 통과하는 공기 몇 그램, 혹은 코 끝으로 느껴지는 반복된 들숨과 날숨 같은건지도 모른다. 그 흐릿한 경계를 작품으로 이어가고자 한다.